드라마 (2002-07-18)

Writer  
   achor ( Hit: 2313 Vote: 26 )
Homepage      http://empire.achor.net
BID      개인

우리가 사랑하는 데에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는 이미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왔다는 데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bothers는 기어이 미팅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기말고사, 월드컵, 여름방학 등등 많은 굵직굵직한 행사들이 연잇는 이 때에
이미 한 달 전 미팅을 완수해 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내내 미팅을 잊고 있었는데
함께 참가하기로 했던 길수나 용팔, bothers 등의 전화를 받을 때만
아, 미팅 하기로 했었지, 왜 아직도 안 하냐, 상기하는 정도였다.
간혹 친구들 사이에서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가장 밝힐 것 같은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나이지만
맹세컨대 이번만큼은 미팅 참가자들 중 내가 가장 소홀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이것을 증명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다.
나는 유일하게 미팅에 늦은 사람이었으므로. --;

사실은 며칠 전부터 ooni 덕택에 디아를 다시 하게 됐는데,
한 번 가면 끝까지 가야하는 릴레이, 소위 버스를 타다보니 결국은 1시간이나 늦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황급하게 가고 있던 지하철에서
용팔과 bothers의 전화는 연이어 걸려왔다.

왜 아직 안 오냐?
지금 열나 가고 있다. 애들 어떠냐?
싸가지다. 아무튼 빨리 좀 와라.

성신여대 미대 4학년.
이미 미대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린 터,
나는 이미 미대생임에도 아름답지 않는 여자들을 많이 봐왔었다.
나는 그녀들이 열나 폭탄이면서 미대생이라는 자존심으로 싸가지 없게 굴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그녀들이 처음부터 아무 말 없이 깡소주 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곤,
가서 더욱 싸가지 없게 복수해줄 계획으로 최대한 서둘렀다.

드디어 대학로,
모두들 모여있는 술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예상과 달리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로 나는 여자애들이 꽤나 괜찮았다는 데에 놀랐고,
두 번째로 조금 전 전화 통화와는 달리 너무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다시 놀랐다.

4학년이나 되는 애들을 만나면서 이렇게 예쁜 애들이 나올 거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이미 애인 있을 사람들은 다들 애인 있을 나이임에도
그녀들은 내 미팅 역사 최고의 미팅 수준을 기록했던 게다.

또한 용팔이나 bothers의 전화 통화와는 달리 시종일관 웃음이 넘쳐나고,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용팔의 힘이었다.
용팔은 내가 늦은 1시간 동안 이미 분위기를 휘어잡았고,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그녀들 또한 싸가지 없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용팔의 재롱에 흥겹게 웃고 있었다.

아. 이렇게 물이 좋을 줄 알았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미리부터 준비하여 말끔하게 나갔을 것을...
밤새 디아를 한 후 초췌한 모습으로 나온 스스로에게 실망과 한숨만 나올 뿐. !_!

용팔이 한 명을 찍었나 보다.
나는 용팔을 밀어줄 생각으로 버스를 타겠다곤 한 채 용팔과 그녀를 먼저 보내준다.
그러나 이미 버스 끊긴 시각. --;
나는 잠시 후 홀로 지하철 역으로 가서 지하철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용팔은 다른 여자애를 찍었다고 전화해 왔다.
흐억. --;



뭐 뭐든 좋다.
그녀들은 모두들 아주 예뻤지만 나는 이상스레 아무런 의욕도 느낄 수가 없다.
잘 됐다고 치자.
그런 다음에는?
결혼을 하든가, 이별을 하든가 해야하는 건가?
그런 다음에는 무얼 해야할 지 모르겠다.
또한 이렇게 고민하는 건 내가 꿈꾸는 사랑이 아니다.
잴 것 없이 마냥 빠져들어야 내게는 제대로 된 사랑이다.

나는 이 시대의 사랑이 너무나도 패턴적이라는 생각을 기습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어떤 행위를 한다면
그녀는 이미 그것을 예상했고, 또한 그녀는 그에 걸맞는 행동을 내게 해준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결실 맺어지든, 혹은 나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든
그것 또한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다.

내가 하는 행동들, 내가 하는 말들,
또 그녀의 것들 역시.
술을 따라주거나 손수건을 꺼내는 것, 뭘 좋아하냐고 묻거나 이제 어디 갈까요? 이제 뭘 할까요? 묻는 것.
모두가 어디선가 봄직한, 이미 연상되는 일들이다.
나는 마치 꼼꼼한 대본을 읽듯 매너리즘에 빠진 채 행동하는 일이 싫어졌다.

이 모든 것은 드라마 탓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존재할만한 대부분 사랑의 방식을 충분히 드라마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소설이든, 대중가요든...
너무 많은 문화의 각 분야에서 다양한 사랑을 이야기 해놓은 지라
한 번의 삶에서 몇 번 겪어보지도 못할 사랑의 이야기를 모두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그러기에 이미 사랑은 식상해져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서 본대로 하여 여자를 사귀고,
그리고 영화에서 본대로 멋지게 결혼한 후
소설에서 본대로 때론 사랑하고, 때론 갈등하며 그냥 그렇게 살다가
대중가요에서 본대로 삶과 사랑을 마무리 짓는다면
아, 이 젠장할 사랑을 어찌 용서할 수 있으리.

그렇지만 아이씨, 그럼 또 어쩌자고.
언제까지라도 외로움에 당당한 자신이 있나?
아니면 식상하지 않은 사랑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나?
아무 것도 없으면서 아이씨, 뭘 어쩌자고. --;

아. 젠장할.
고등학생 시절에는 매일 사랑타령만 하는 대중가요가 그렇게 불만족스러웠는데
이제 보니 모든 대중가수들이 그토록 연연해야하는 까닭이 사랑에 있었던 게다.
모두들 사랑 말고 다른 가사를 붙이고 싶었었지만
이토록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사랑의 힘 앞에서 결국 뜻대로 하지 못했던 게다.

지금은 사랑이 삶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 삶의 가장 큰 의미가 사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다.

아이씨.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167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achor.net/board/diary/630
Trackback: http://achor.net/tb/diary/630
RSS: http://achor.net/rss/diary

Share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ggoob2002-07-21 22:36:05
정말 사랑이란걸 하게 된다면,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을거야.

 해바라기2002-07-23 02:06:03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 사랑할수밖에 없기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이것이 아처가 원하는 사랑이겠지??

 해바라기2002-07-23 02:09:09
넌 행복한 녀석이야..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래..

 bothers2002-07-24 01:01:55
위에서 니가 말했던 것들을 싸잡아서 우리는 시뮬레이션 효과라고 부른다.

 bothers2002-07-24 01:02:39
드라마가 그 첨병역할을 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패턴이 너무 많아져서 무슨 짓을 해도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건 슬픈일이지.

 bothers2002-07-24 01:04:06
어쨌든 임마 니덕분에 나 요즘 죽어산다 -_-+ 나쁜쉐

 achor2002-07-24 11:32:37
공부도 못 하면서 괜히 잘 하는 척 하지 마라. --;

 bothers2002-07-24 22:04:36
이쉑. 이번학기에 무려 A+을 받은 과목에서 다뤘던 주제다. 뎀비지 말지어다. -_-+

Login first to reply...

Tag
- 드라마: 똥 싸던 차승원과 마주 서다 (2011-01-13 00:01:37)- 용민: 성훈,용민과 함께... (2017-11-24 11:22:32)

- 드라마: 동네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미용실에서... (2015-11-09 01:49:41)- 용민: 담배 유형의 차이만큼... (2017-09-30 12:17:34)

- 드라마: 매리는 외박 중 (2010-11-30 01:19:00)- 사랑: 앙큼한 돌싱녀 (2014-04-01 01:47:26)

- 용민: 무소유 (2001-11-21 13:53:16)- 용민: (아처) 나 싸우리라 (1997-05-16 22:50:00)

- 용민: 용민 결혼 (2010-02-09 03:12:07)- 용민: (아처) 十元結義 (1997-05-17 02:22:00)



     
Total Article: 1963, Total Page: 273
Sun Mon Tue Wed Thu Fri Sat
  1
초콜릿 [1]
2 3
정책세미나에 다..
4
정영의 합격
삶 [1]
5 6
7 8
칼사사여! 영원.. [3]
9 10 11
삼각김밥 [1]
12 13
14 15
옛 컴퓨터 [2]
16 17 18
드라마 [8]
19 20
칼사사 2002년 8월..
21 22 23 24
먹고 사는 일에.. [3]
25 26
도시에서의 사랑
27
28 29 30 31
일본에 갑니다 [3]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Poll
Only one, 주식 or 코인?

주식
코인

| Vote | Result |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추천글closeo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