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色 (2002-09-10)

작성자  
   achor ( Hit: 920 Vote: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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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빨리 일본담을 정돈해 놔야지 내내 생각했으면서도
어느새 오늘로써 일본으로 떠난 지 한 달이다.
여전히 엊그제 일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일본에서의 여름이 시작될 것만 같은데
그것이 벌써 한 달 전 이야기였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은 지금의 내게 있어서 두려움이다.
어쨌든 모두 싸그리 잊어버리기 전에 travels란을 마저 채워넣자.



어제는 학교에 갔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흥분했었나 보다.
홀로 고무되어 새벽까지 안 자더니만
결국 오늘은 낮에 잠들어 학교에 다시 못 가고 말았다.
오늘은 가볼만한 날이었음에도 말이다.
내일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이순간 각오를 다질 필요는 없다.
수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수요일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월, 화 학교에 가고, 수요일은 쉬고,
목, 금 다시 학교에 가고, 주말은 쉬는 게 적절한 배정이다.
이런 배정 속에서도 수요일에 수업이 있다는 건 나조차도 유감이지만
교수님께 수요일 수업을 옮겨달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포기한다.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버려야 한다는 진리.
그것은 바둑에서도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던가.
모든 걸 다 가지려 하지 말자. 버릴 건 과감하게 버리고, 포기할 건 과감하게 포기하자.



사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노래도 잘 부르지 못하고, 악기도 잘 연주하지 못하며, 스포츠를 좋아하거나 영화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과거 학창시절 부모님과 선생님들 덕에
휘호대회에서 입상을 한다거나 채르니 30번을 친다거나 축구를 한다거나 뭐 그러기도 했지만
사실은 내가 잘 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나는 그냥 존재하는 걸 좋아한다.
움직이지 않은 채 사색을 하거나 잡념 갖는 걸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존재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죽은 듯이.
나는 단순히 내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 고민만을 가지면 된다.
삶의 경계가 모호한 상태, 옆에서 에러라도 냈던지 삑삑~ 컴퓨터 소리만이 타인의 존재감을 주는
그런 상태가 좋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 그림을 그린다.
가만히 내가 그려놓은 그림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고갱의 후기 인상주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좋다. 자화자찬이라고 치자.
그래도 나는 내 능력밖의 영역인 그림에서 이토록 만족감을 느끼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정밀화나 사실주의적인 그림은 능력도 안 될 뿐더러 부럽지도 않다.
예술이라는 것은 모방의 분야도 있지만 창조의 분야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
자신의 느낌이 더 크게 드러나는 인상주의야 말로 보다 큰 창조라 생각하고 있다.
시간날 땐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자.



1980년대 후반 컴퓨터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뒤따르던 사무자동화, OA라는 게 있었다.
이것은 기술이나 공업 같은 과목의 단골 시험 문제이기도 했는데
컴퓨터와 같은 기계장치를 통해 사무 작업을 뭔가 자동으로 하는 건가 보다. 이건 그닥 관심 없다.
다만 내가 OA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이 자동화의 영역이 디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였다.
컴퓨터는 스스로 디아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이 점에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게임이라는 것이 엔터프라이즈의 영역인데 네가 즐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디아를 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디아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질문이다.
대개의 RPG은 보편적으로 노가다성 노동을 요구하는 편이다.
이것은 YS나 나이트건담 시리즈와 같은 옛 RPG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으로, RPG라는 분류 자체가 노가다성향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경험치를 얻어 자신의 캐릭터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작업이
단순반복으로 이루어지는 노가다의 대표적인 일인데
적어도 디아는 카우레벨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그런 노가다는 없지만 반면 아이템을 구하기 위한 노가다가 다시 필연적이 된다.
물론 이런 노가다도 처음에는 즐거움이 될 수 있으나
연속되는 노가다는 그저 노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변절된다.
컴퓨터는 핀들스킨이나 매피스트를 잡아가며 이런 노가다를 나 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과학적이며 감각적이기도 하다.
X,Y,Level 좌표를 통한 위치 계산은 기본이고,
에너지가 적을 경우 포션을 먹거나 혹은 포션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치명적인 위기일 때는
인간이 할 수 없는 한계 시간 단위로 접속을 강제 종료시켜 버린다.
곧 컴퓨터가 요구하는 사항만 맞춰준다면 캐릭터는 디아 내에서 결코 죽지 않은 채 무한적으로 사냥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그렇게 컴퓨터가 얻어낸 아이템을 판별하고, 각 필요한 캐릭에서 배분하며,
그런 무장을 갖고 다른 컴퓨터가 얻어낸 타인의 캐릭터와 대결한다.
이것이 나의 재미다.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세계를 생각한다.
마치 이미 부를 창출해낸 강대국의 기업이 제3세계 어린이의 노동력을 착취하듯이
나는 컴퓨터를 착취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컴퓨터에게 감정이 없다는 게 다행일 지도 모른다.
컴퓨터가 아주 예쁜 여인의 모습으로, 나에게 이런 노가다는 시키지 말아주세요, 이런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라고 말한다면
내가 그녀를 디아 노가다 시키기 위해 구입했다 하더라도 아. 나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상상이다.
쓸데 없는 생각 말고 일이나 하자.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114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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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