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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월드] 누나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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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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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한테 편지가 왔는데..
시리즈로 이어지는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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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감상] 사랑하는 당신께 -I-
보낸이 : 깜짝볼(박지혜) 97/01/21 22:01
사랑하는 당신께
창밖은 칠흑처럼 깜깜합니다. 멀리서 밤길을 달리는 차 소리가 다시 오다가 사
라졌습니다. 아마도 인적이 드문 길에서 무척 속력을 내었나 봅니다. 제 등줄기
가 그 차소리를 따라서 쭈욱 굳어오다가 다시 편안해집니다. 혹여라도 당신이 오
시나 했었나봅니다. 당신은 바쁜 사람인데 말이에요.
지금 막 청소를 마쳤습니다. 그릇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옷장 속의 옷들을 차
곡차곡 개어놓고 먹다 남은 냉장고의 음식들도 버렸습니다. 빨래하는 내 손이 안
쓰럽다면서 당신이 손수 골라주셨던 하늘색 세탁기 속에 들어 있는 빨래는 어떻
게 하나, 생각하다가 사실은 조금 혼자서 웃기도 했습니다. 왜냐구요? 빨래라니
요. 사실 이 밤중에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것도 이웃에서 행여 눈치
챌까봐 조심조심 그릇들을 챙기고 내 삶을 정리하면서, 그러면서 빨래라니요....
.. 그런 자신이 조금 어처구니도 없고 그랬기 때문에 웃었던 겁니다. 하기는 그
보다 더 우스운 일은 그 다음에 생겨났습니다. 저는 세탁물을 뒤졌지요. 쿰쿰한
냄새가 나는 빨래 속에서 당신의 팬티와 런닝셔츠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손으로
문질러 빨았습니다. 언제나 처럼..... 하기는 그 옷을 손으로 빨기 전에 대야를
챙기고 비누를 꺼내들면서, 저를 비난하던 한 친구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중독이
라구요...... 제가 당신을 위해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것, 그녀는
그런 일들을 중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일
이 중독되어 있다나요...... 하지만 그 친구가 무어라 하든 저로 말하자면 당신
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중해지는 마음입니다. " 그것도 중독이야" 그 친구
는 말했지요. 그래요, 그래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으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드이어 담담하구나, 하고 말이에요.
지금 저는 당신과 늘 마주앉아 있던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 보니 집안이 윤이 납니다. 냉장고 손잡이에 붙은 알루미늄판이 거울
처럼 반짝입니다. 싱크대 구석이나 가스레인지 아래에 낀 때는 너무 오래되어서
애를 먹기도 하였습니다만,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문질렀더니 겨우 제 빛을 찾았
습니다. 하지만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그것들을 윤내다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
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세월들을 이렇게 닦아 낼수만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많은 눈물과 땀방울을 흘려서라도 처음처럼 다시 윤이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잠시 저는 수세미를 손에 든 채
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것
도 중독일까요...... 아닙니다. 중독이라니요......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건 싫습니다...... 잘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요, 습관이라
는 말이 좋겠지요...... 별로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지만 중독보다는 병적으로
들리지 않아서 좋은 것 같군요.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 놓자고 펜을
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오후엔 백화점에 다녀왔더랬습니다.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지요.
어제까지는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더랬습니다. 어제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김장
을 했거든요. 절여놓았던 배추를 물에서 건져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빼놓고, 커
다란 무를 씻어서 채를 썰었습니다. 그러고는 며치젓을 달여서 한지에 받쳐 즙을
걸러내놓고 갓하고 미나리도 다듬어 씻어 놓았습니다. 며칠전에 까놓은 마늘을
절구에 빻고 김칫속을 버무렸습니다. 일을 마치고 보니 벌써 겨울의 짧은 해가
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올 겨울 내내 당신하고 이 김
치를 먹겠구나, 하고 말이에요. 멸치다시를 낸 물에 잔치국수를 삶아 넣고는 볶
아 놓은 쇠고기 고명과 시금치 웃기를 얹고 이 김치를 얹어 먹으면 문득 겨울밤
도 훈훈해지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저는 조금 들떠버렸었나봐요. 당신의 회
사로 전화를 걸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또 늦으시겠다고 했
습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 너모로 또다른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컴퓨터으 ㅣ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이어서 당신의 목소리가 들
렸습니다. 저는 겨우 말했습니다. "김장을 했어요...... 열 포기를 담갔어요. 배
추가 아주 달아요" 당신은 잠시 양볼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이 웃다가 말했습니
다. " 정말 피곤하다니까......"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
습니다.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제가 정말 미웠습니다. 당신은 괜찮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저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나
쁜 여자인가봐요. 당신은 괜찮다고, 바쁘니가 그냥 끊자고 하셨습니다. 괜찮다는
당신의 말에 용기를 내어서 저는 말했습니다. 굴이 싱싱하길래 조금 샀어요. 사
태도 조금 샀어요. 보쌈을 좋아하시잖아요. 된장하고 고추장을 섞어 배춧국도 끓
였어요...... 오늘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드세요...... 아닙니다. 당신은 그 소
리를 듣지 못하셨지요? 말을 다 마치기 전에 뚜우뚜우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이 끊으신 건가
요? 아닙니다. 그저 전화가 끊겼을 거에요. 우리 집 전화는 당신
의 회사 다이얼만 돌리면 이상하게 고장을 일으키곤 하니까요. 당신이 그러셨잖
아요. 당신 회사의 전화 상태가 좋지 않다고...... 저는 어제 밤 열두시가 되어
서 보쌈을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사태를, 마치 아몬드처럼 길쭉하게 모양도 예쁘
게 빠진걸로 정육점에 부탁해서 한근이나 사두었었는데 그걸 삶아서 다 먹었어
요. 살이 찌려나 봅니다. 당신은 살이 쪄도 절 사랑하신다지만 전 살찐 여자는
싫어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결혼과 함께 은퇴했다가 살이 잔뜩 쪄서 돌아온 탤
런트를 두고 당신은 말씀하셨ㅉ. 정말 보기 싫군......
아닙니다. 전 살이 찌지 않도록 노력해왔어요. 당신과 함께 한지 삼년이 지났
지만 전 아직 처녀 때 스커트를 입을 수 있거든요...... 그래요, 오늘은 백화점
에 갔었어요...... 스커트를 한벌 샀어요. 비둘기색개버딘이에요. 처음에 한번만
드라이를 해주면 그 다음에는 손빨래해도 된대요. 세일이 끝나서 한산한 매장을뱅글뱅글 돌면서
검정 카디건도 한벌 샀습니다. 흑진줏빛 블라우스도 한벌 사고
공단으로 만든 리본이 달린 자주색 구두도 한컬레 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주색
꽃무늬가 화려한 스카프도 하나 사려고 했는데 그만 지갑이 텅 비었더군요......
그동안 당신이 주신 반찬값을 조금 아껴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찾았거든요. 저
는 매장에 있는 아가씨에게 그건 다음에 와서 사겠다고 말했습니다. 꼭 사고 싶
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습니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때 상투적인 핑
계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별로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자가 와서 그 스카프를 만지작거렸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헐렁한 청바지를 입
은 채 유모차를 끌고 있던 그녀의 손 위로 그 스카프를 넘겨 주었을때, 마치 그
스카프가 가시덤불로 짠 거친 직조물처럼 제 가슴을 스쳐가는 것 같았습니다. 여
자는 그것을 목에 둘러보고 결국 그것을 샀습니다. 저는 다른 스카프를 고르는
척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유모차에 앉아서 빤히 저를 바라보던, 토끼
모양의 목도리를 두른 아이와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이 지난달에 제가 모은 적금을
다 가져가셨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구요, 아닙니다. 그
게 아닌데 글이 왜 이렇게 써지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 느낌을 숨김없이 당신
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새로 산 옷들을
옷걸이에 잘 걸었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저런 차림으
로 갈곳이 없어요. 대리점도 그만두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혼자서 그 옷을 입
어 보았습니다. 구두도 신었어요. 방안의 장판이 구둣굽에 상처입을까봐 조심조
심 걸어도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그 옷을 입고 이 글을 씁니다. 이렇게 좋은 옷
을 입어보기는 정말 처음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무렵에 저는 정말 촌스러웠지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 보따리만 들려놓으면 영락없이 서울역 앞의 갓 상경한 소녀같다구요......
사실은 뒤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입니다. 오빠 등록금대기가 빠듯했어요. 제가 살
던 그 소도시에 있던 여대 앞엔 나가보지도 않았지요. 너무나 입고 싶은 옷이 많가 모은 적금을
다 가져가셨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구요, 아닙니다. 그
게 아닌데 글이 왜 이렇게 써지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 느낌을 숨김없이 당신
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새로 산 옷들을
옷걸이에 잘 걸었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저런 차림으
로 갈곳이 없어요. 대리점도 그만두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혼자서 그 옷을 입
어 보았습니다. 구두도 신었어요. 방안의 장판이 구둣굽에 상처입을까봐 조심조
심 걸어도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그 옷을 입고 이 글을 씁니다. 이렇게 좋은 옷
을 입어보기는 정말 처음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무렵에 저는 정말 촌스러웠지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 보따리만 들려놓으면 영락없이 서울역 앞의 갓 상경한 소녀같다구요......
사실은 뒤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입니다. 오빠 등록금대기가 빠듯했어요. 제가 살
던 그 소도시에 있던 여대 앞엔 나가보지도 않았지요. 너무나 입고 싶은 옷이 많아서 언제나 그
거리를 피해다녔답니다. 저 여대생들은 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옷가게에 걸린 옷들을 저렇게 잘도 살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더는 하기 싫었던
스물한살, 그때 나의 삶은 언제나 귀엥서 아린 겨울바람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내 앞에 와주셨지요. 당신은 제가 근무하던 잡화점에 면도기를 사러 오셨
습니다. 출장을 왔는데 그만 면도기를 ㅃ놓고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그때
당신에게선 벌써 애프터 세이브 로션의 향취가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은 신
용카드를 내미셨지만 우리 가게에선 그때 신용카드를 받지 않았지요. 당신은 몹
시 당황해하셨습니다. 전 당신에게 그냥 맘에 드는 물건을 가져가시고 대금은 다
음에 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서울에서 오신 당신은 웃으며 말씀하셨
어요. 날 어떻게 믿느냐고 말이지요,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은 믿을 수 있
는 분 같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그게 운명은 아닐까 하고 저는 그후 내내 생각했
습니다. 다음달에 다시 그 도시에 오신 당신은 제게 말했지요. " 아가씨, 서울로 취직하고 싶지
않아? "
그래요, 서울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다시금 기억이 살아납니다. 마치 오
래 덮어 두었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선명하게 말이에요...... 제가 스물한살이
던 그때 그 소도시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성당의 마
당에는 성모상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신자는 아니였지만 그 성모상을 지나치면
서 늘 빌었습니다. 아아,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켜주세요. 누군가가 와서 내 삶을
뒤흔들게 해주세요...... 저는 한번쯤 내 귓가에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스치기
를 기다렸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영화 구경을 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고 싶어...... 나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잖아?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어들고 싶
기도 했던 날들이 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내게 물어주셨던 겁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어요. 얼굴도 붉히지 않고 저는 말했습니다. 저를 서울로
데려가주시겠어요?
저는 당신의 전화번호를 들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당신 한분뿐이었어요. 공중전화를 들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누르는데 그
전화의 꼬불거리는 줄이 마치 제가 이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유일한 줄, 이런 표
현이 괜찮다면 마치 탯줄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이고 저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인 듯이 말이에요, 만일 당신이 그 전화가 이어진 그
선의 끝에 계시지 않으면 숨이 턱하고 막혀버릴 듯이 겁이 났었지요, 당신은 거
기 계셨습니다. 오래전에 예정된 운명처럼요. 그리고 저는 당신 친구의 전자대리
점에 취직했습니다. 당신은 자주 대리점에 오셨어요. 가끔 절 데리고 나가 양식
을 사주시기도 했지요. 처음 포트와 나이프가 여러개 있는 식탁에 앉았을때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당신은 모르실거에요. 그것들은 내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처럼 식탁 위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황하는 제게 무척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몇잔 드시고 나서
저를 빤히 바라보셨지요. 제가 예쁘다는 말을 하실 때 떠리던 당신의 입매를, 그
입매의 괴로운 듯한 뒤틀림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기혼자
였고 한 아이의 아빠였음을 저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의 아빠이며
한 여자의 남편인 당신......여기서 그만 당신과의 만남을 끝내야 한다는 걸 알
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생애에 끼여드는 건 옳지 않다고
다짐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꼭 그만큼의 끌어당김이 내
마음속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그래요. 그 자리를 맴돌던 제게 어느날인가 또 당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대
리점 사장님인 당신 친구분하고 당신하고 또 한 친구분 -당신들은 아주 어릴 때
부터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들이 보여서 갈비를 먹기도 했지요, 그때 우리 대리
점 사장님이 저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사람......
또 한친구분도 말했습니다.
"이놈 정말 좋은 놈이에요"
그 며칠 후인가 당신이 제게 여행을 제의하셨을때 제가 당신을 따라나선 것은 아
마도 그 말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 좋은 남자...... 나는 사람들이 어떤 여
자를 가리킬 때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제의를 무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남자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당신하
고 어렸을때부터 함께였던 사람들이 한 말을 제가 어떻게 믿지 않겠습니까......
대천 바닷가에 엷은 주황색 노을이 깔릴때, 그 노을이 바라다보이는 횟집에서 소
주잔을 기울이며 당신은 지금 별거중이라는 말씀을 하셨브니다. 곧 이호서류에
도장을 찍을 것이고 그리고 괴롭다고요...... 당신 아내의 의심증에 대해서도 말
씀하셨습니다...... 좋은 남자인 당신을 당신의 아내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다
고요. 직장을 여러번 옮긴 것도 그 아내 때문이었다고요.
도망가고 싶은 의무감과 당신 쪽으로 끌려가고 싶은, 팽팽히 이어진 내 마음의
망설임이, 그 팽팽한 현이 제 가슴속에서 툭, 끊어져버렸습니다. 의처증에 걸린
남자의 아내를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제가 중학
교 때였던가요, 사료값도 안 되는 값으로 소를 팔아버린 후 아버지에게 도지기
시작한 그 병......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터무니없이 의심할 때 오는 불행을 누
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였기에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뜬눈
으로 새운 제 귓가에 밤새 파도소리가 들렸습니다.내 귓가에 당신의 사랑한다는
말도 들려왔습니다. 내 귓가에서 처음으로 겨울바람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
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었지요.
" 전 당
그래요. 그 밤에 당신이 먼저 잠드셨을때 저는 혼자 다짐했습니다. 좋은 여자
가 되겠다고 말예요.
당신은 저를 자주 찾았스빈다. 저는 당신의 속옷도 빨아드리고 머리도 잘라드
렸습니다. 머리를 자르려고 목욕탕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두르고 앉은 당신의 모
습은 천진한 소년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한번 다짐했습니다.이 사람을 악마 같은
부인으로부터 구해드리자고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옥 끝까지도 뛰어들겠
다고요. 아아, 정말이지 내 몸하나 부서져서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하
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 같은건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내게 좋은 분이셨으니까요. 당신은 정말 좋은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일년 후 우리는 산부인과로 갔지요...... 의사는 경고했지요.
"세 번이나 이러시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이에요. 당신은
울먹이셨습니다. 미안하다고 내 손을 잡고 몇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했으니까요. 당신 부인이 아이를 낳고 난 후 의심증이
생겼기 때문에 당신은 아이가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될까봐 무섭다
고 하셨습니다. 전부인하고의 상처가 너무 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내 뱃속에서 세번째나 꿈틀거리는 이 생명들에 대해 더 집
착이 생기기 전에 없애버리고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괴로워하셨습니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느
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지만 당신은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습
니다. 제가 마취에서 덜 ㄲ어나 힘이 없었던가봐요. 저는 더 힘차게 고개를 저어
드릴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당신은 그 며칠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저를 간호해 주셨스빈다. 제 건강은
이미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대리점도 그만두고 늘 누워야 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날인제 제가 기운을 좀 차리자 당신은 제 손을 이끄셨습니다. 우리는 강변으
로 드라이브를 나갔지요. 봄볕이 강물 위로 쏟아져내리고 벚꽃이 흩어져 휘날렸
스빈다. 저는 당신의 옆좌석에 앉아서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볕을 쬐고 있
었습니다. 당신은 좋으냐고 물으셨스빈다. 저는 이마에 손을 짚었습니다.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였스빈다. 내 인생의 겨울 바람 소리는 당신을 알게 된 후 사라졌
지만 이 회사하기만 한 봄볕은 어쩐지 저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났
습니다. 내 행복감이 이 봄날의 꽃이파리처럼 그저 흘날려버릴 것만 같아서 저는
두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강변이 잘 내려다보이는 까페에 차를 세우셨고
우리는 그리고 들어가 싫토록 봄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당신은 그 집의 토분항아리에 가득 꽂힌
패랭이꽃 다발 앞에 서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아까부터 그 호아토색 토분에 가득
꽂힌 연보라색 패랭이 꽃 다발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꽃은 참 아름다웠
습니다. 엄지손톱만한 수백의 꽃송이들로 이루어진 패랭이꽃 다발......
자리고 돌아온 당신은 물으셨스빈다.
"저 꽃이 조화일까 진짜일까?"
우리는 함께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꽃은 완벽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연
보라빛은 진주빛 광택을 발하고 있었고 잔디잎새 같은 연초록 이파리는 알맞게
늘어져 있었으니까요. 당신은 조화 같다고 하셨고 저는 진짜 패랭이꽃 같다고 말
했습니다. 우리는 내기를 걸었스빈다. 당신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 왜 진짜라고 생각하지?"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아까부터 그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저는 그 아름답기 만한 꽃의 아랫부분,
그러니까 토분과 맞닿은 언저리에서 시들어 누렇게 된 이파리를 하나 발견했던
겁니다. 조화라면 그런걸 만들 필요가 없었겠지요. 시퍼렇게 살아 날뛰는 것만만들어도 될 테니까
요. 하지만 그건 가짜입니다. 살아 있는 것에는 분명히 생채
기가 있습니다. 촌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그걸 알고 있습니다. 들꽃이나 나무
에도, 새나 강아지나 들고양이에도, 하도 못해 구르는 돌멩이까지 살아 있는 것
은 반드시 생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걸 설명해드리고 싶었지만 당
신이 웃으실까봐 겁이 났습니다. 터무니없다고도 말씀하실 것만 같았어요.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우리는 말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스빈
다. 당신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토분 언저리에 있는 누렇게 시든 이파리
를 집어 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을 겨우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당신
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그저 우연히 끼어든 불순물일 뿐이라구."
그러고 보니 그런것도 같았습니다. 당신은 좋은 생각이 있다며 주인 모르게 패
랭이꽃 한송이를 집어 내셨습니다. 패랭이꽃은 진ㅈ빛 광택을 입힌 듯 은은하게
빛났습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꽃 같았습니다. 당신은 잠시 궁리하더니 그 연한
보라색 꽃이파리를 손톱으로 누르셨습니다. 그것이 가짜꽃이었다면 당신의 손톱
밑에서 구겨졌다가 다시 펴지겠지만 진짜 꽃이이라면 다시는 예전처럼 꽃이파리
를 펼 수 없겠지요...... 아아, 그런데 그것은 살아 있는 꽃이었습니다. 당신의
손톱 끝에는 금방 푸른 물이 들어버렸고 당신의 손아귀에 있던 패랭이 꽃은 푸른
즙의 덩어리가 되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뭉개진 꽃은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습
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날 해가 질 무렵 노을을 마주보며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운전을 하시는 당신의 손톱 밑에 푸른 패랭이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
였을까요? 저는 그후로도 오래오래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산
것을 짓이긴 벌이었을까요? 당신은 저의 집에 발길이 뜸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밤바다 제 가슴속에 패랭이 꽃이 피었다가 짓이겨져 푸르게 물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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