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나는 근시일 내에 가장 바쁘게 지냈다.
동대문, 압구정, 대학로, 홍대, 목동 등을 빡빡하게 쏘다닌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고,
재미교포, 연예인지망생, 대학교수, 시민운동단체장들과 술 마시며 이야기 한 것도 특별한 일이었다.
미팅으로 만난 재미교포는 신문 사회면에서 자주 보던 환락과 쾌락에 찌든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들은 완벽히 정반대로,
외교관이나 대학교수인 아버지 밑에서 철저하게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고, 또 이를 스스로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기분이 좀 좋지 않았다.
뛰어난 1%가 우매한 99%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싫었고,
또 당연히 그 1%는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모습이 싫었다.
그녀들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군대에 가지 않는 오빠와 남동생 이야기를
마치 커다란 권력이나 되는 양 당당하게 이야기 하였다.
또한 영어제일주의의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보통의 한국인들을 가엽게 생각하며
그런 영어공부 대신에 미국 변호사 공부를 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감이 넘쳐나는 모습이었다.
나는 미팅이란 본분을 잊은 채 그녀들에게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그런 특권의식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세상을 이끌어 간다는 사실에 환멸이 느껴졌다.
그러나 미팅 분위기는 내 기대와 달리 화기애애했다. --+
그녀들이 특별히 겸손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오만하다거나 공주쪽 인사는 아니었는 데다가
화려하게 꾸미고 있지는 않았지만 본판이 그리 엉망인 것도 아니었기에. --;
어쨌든 그녀들도, 또 나도
서로 평소 만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을 만난 유쾌한 기분을 갖고 헤어졌다.
자. 연이어 소개팅이다.
약속시간을 잘못 알고 있어서 무려 1시간이나 지각하며 자리에 나갔다.
사전에 연예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소개팅을 한 지라 내심 기대를 많이 했지만
아직 연예인은 아니었고,
연예기획사에 소속되어 열심히 연예인 수업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뭘 배우냐고 했더니 노래하는 거나 연기하는 것, 춤추고, 말하는 것 등을 배운다고 했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예쁜 척을 해낼 줄 알았다.
그렇다고 공주는 아니여서 자기 스스로 지금 예쁜 척을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며,
가끔은 자신보다 예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연예인 되는 게 두려울 때도 있다며 겸손해 하기도 했다.
또한 밝고 명랑하게, 게다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냈다.
나는 그런 여자애를 예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3-4년 전에 어떤 여자아이도 그랬는데 그녀는 나와 연락이 끊긴 이후에 CF 모델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어느 CF에서도 볼 수 없지만 당시에는 조금 놀라웠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녀도, 3-4년 전에 알았던 그녀도 꽤 매력적이긴 했지만
놀랄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하긴, 만약 내가 소개팅에서 연예인이 되기 전의 장나라나 소유진 같은 애들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별로 매력을 못 느끼다가 나중에 조금 놀랄 건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녀는 내게 생긴 것과는 달리 진지하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아이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좀 진지해 지는 모양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철 없고, 진지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록 경박해 지는 편임에도
어린 아이들을 별로 못 만나봐서 그런지 어쩐지 좀 어께에 무게가 들어가는 것도 같다.
소개팅이나 미팅을 마친 후 전화번호를 물어본 건 참으로 오랫만의 일이었다.
몇 달 전에 만났던 역대 최고 수준의 질을 자랑했던 미팅에서도 나는 연락처를 묻지 않았었고,
그 외 다른 소개팅에서도 그 날 하루만큼은 즐겁게 놀다가도 그렇게 헤어지고 나면 끝인 편이었다.
연락처를 알게 된다고 내가 연락을 할 것 같지도 않았고,
또 연락을 하게 되어 서로 알고 지낸다 하더라도 그 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결혼을 하든가 아니면 다시 연락하지 않을 것인데
그 둘 모두 관심 없는 일이었다.
이 여자아이가 특별하게 느껴진 건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의 미니스커트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
연달아 3일째 외출이다.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자연스럽게 밤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로 변해버린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소개팅이나 미팅 같은 게 아니고 일 때문이다.
홍대에서 상대편 사장님을 만난다.
그 분은 내년에 변호사, 의사들과 일을 쭉 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자기네가 맡은 파트 이외에 우리와 관련된 파트를 우리에게 주선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기분이 좀 우울해졌다.
그 분의 사업 진행방식이 학연에 기인한 쪽이었는데
그것이 올바른 사회 정의는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내 내재적인 정의감이었는지도 모르겠고,
또 어쩌면 그 분들과 같은 학연이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부담감일 지도 모르겠다.
아님 둘 다 아니고, 그냥 배가 고팠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고. --;
그리하여 돌아오는 길에 배도 고프고, 우울하기도 하여
동네에 사는 miki를 불어내어 대낮부터 술 한 잔 마셨다.
전화가 온 건 그 때다.
예전 안티SBS 때문에 시민단체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는데 그 분 중 한 명이 함께 시민운동을 해보자고 연락이 온 게다.
돈 하나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관심 있는 일이었다.
좀 늦은 시간인 데다가 이미 술 한 잔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목동까지 가본다.
한국사이버감시단이란 시민단체인데 올해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로 잘 나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민단체는 시민단체인 지라 열악한 상황은 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단체장님과 고문으로 계시는 교수님 등과 또 다시 술을 하게 됐는데
교수님과 술을 마셔보는 건 평소 내 꿈 중에 한 가지이긴 했다.
그러기에 비록 우리 과 교수님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나이가 어렸다.
담배 한 대 제대로 못 폈지만 나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는데 그 분들이 나 때문에 조금은 불편해 하시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지난 소개팅에서 어린 아이 앞에서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좀 진지했던 것처럼
그 분들도 평소처럼 이야기하지 못하고, 좀 진지해야 했었나 보다.
그렇지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그 분들이 편안해 진 것과는 달리
나는 오히려 불편해 지고 있었다.
내내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는데 나는 그 분들의 이야기들을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시민운동의 현재인지, 아니면 변절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산 출신 단체장과 교수님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가 나왔고,
그것은 특정 정당에 상당히 편중되어 있었다.
내가 우려스러웠던 점은 시민단체라면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완전히 선을 끊고,
오직 정의만을 추구해야 할 것인데
단체의 장과 고문들이 그렇게 편중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좀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런 견해를 피력하였더니 모두들 잠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곤 이내 그런 건 아니라고,
시민운동이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거리를 두는 건 당연하지만 시민운동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후에도 나는 그 분들과 의견이 많이 부딪쳤다.
그 분들은 시민운동을 하고 계셨지만 내가 꿈꾸던 시민운동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세상을 알지 못하기에
그저 이상향만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분들 또한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함께 운동해 보자는 제안에 대한 답변을 유보한 채 다시 연락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단체장님은 자신도 사람들과 이야기 해가며 다른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다른 지식들도 얻게 된다 하시며
시민운동은 누군가 한 사람의 생각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렇게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내가 꿈꾸던 세상을 정책에 반영시켜 조금이라도 이뤄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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