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평화롭고 상쾌하며 어쩐지 느슨하게 여겨지는 이 기분이 아주 좋다.
물론 평소에 그닥 분주하게 사는 것은 아님에도 말이다.
이럴 땐 햇볕이 내리쬐는 공원이나 경건함이 느껴지는 성당에 가고 싶은 생각까지 하곤 한다.
물론 생각만이다. --;
나는 대개 이 시간에 잠을 잤다.
그래서 이런, 기분 좋은 일요일 아침은 평소 그리 많이 느끼는 건 아닌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렸을 때 읽었던 외국 소설도 생각나고, 예쁜 여자 아이가 있었던 교회도 생각나곤 한다.
이런 걸 보면 내 유년기에 의식하지 못한 채 접했던 서구문물들이
지금 내가 다소 반서양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제와서 동양, 서양 구분하는 것도 좀 우습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서울, 경기 지역을 제외하곤 전국에 비가 내린 후 얼음이 얼 정도로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보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서늘하다.
지난 토요일, 그간 미뤄놨던 잠을 대여섯 번에 걸쳐서 짧게, 많이 자 놨더니
꼬박 밤을 샜는데도 아직 말짱하다.
오후에 가족외식이 예정되어 있는데 부디 자다가 못 나가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의 내 소망이다.
오랫만에 살아있는 아침인만큼
나도 다른 이들처럼 밝고 건강한 아침을 먹을 생각을 했다.
이왕이면 밥을 해먹고자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사진을 보라. !_!
사진으로 표현된 모습은 아무래도 그 곰팡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직접 눈으로 보면 이 엄청남이 몸으로 느껴져 온다.
또 실제로도 지난 몇 달간 간혹 밥을 하려고 시도했던 그 누구라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밥통을 열어보는 순간 그저 경악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평소의 내 삶을 측은하게 생각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중에는 형님께서 우리의 식대를 영수증 처리 해주시기 때문에 대체로 하루 한 두끼는 단골 식당에서 아주 잘 먹고 있다.
다만 문제라면 혼자 있는 주말뿐. !_!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주말에는 그간 쌓아왔던 공력을 바탕으로 쭉 굶은 후
멤버들이 모이는 화요일에 폭식을 하곤 한다. --+
어쩔 수 없이 밥은 못 먹겠고...
그렇다면 오랫만에 고기를 먹어봐야겠다고 결심한다.
고기라 해봤자 내가 해먹을 수 있는 건 내 주식 중 한 가지인
철판 비엔나소시지 볶음. --;
집을 나서니 날씨가 흐리다.
일기예보대로 지난 밤 비가 조금 왔었던 것 같다.
내내 밤을 지켜줬건만 언제 비가 온 건지...
아침 바람이 정말 차갑다.
질끈 묶어놓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슬리퍼 속의 맨발이 움츠려진다.
총총 걸음으로 아침 일찍 문 여는 슈퍼를 찾아가 비엔나소시지와 게맛살 한 개씩 사온다.
엇. 옆집 여자다.
이곳으로 온 지가 1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이렇게 가깝게 스친 건 처음이다.
사실 아직도 양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있다.
가끔은 남자가 사는 것도 같고, 가끔은 여자가 사는 것도 같고. 같이 사는 것도 같지만 부부 같지도 않고... --+
이것이 지방으로 이사간 친구가 말하는, 그 도시의 삭막함, 혹은 사생활 보장이던가.
어쨌든 옆집 여자의 몸매는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그렇지만 짧은 머리에 웨이븐지, 아줌마파만지 모를 걸 한 건 좀 별로다.
어찌 보면 나이는 나보다 어릴 것도 같고...
이번 역시 서로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그저 스친다.
아니 오히려 문을 열고 나오려다 내가 오는 걸 보며 멈짓멈짓하다 내가 들어온 후 그녀가 나온다.
이상하다. 양 옆집 사람들이 우리를 피하려 한다. --;
하긴 뭐 상관 없다. 이상한 파마 머린. --+
자. 요리다.
피자 먹고 남은 핫소스를 찍어 먹으려 했지만 짜놓을 그릇이 없다.
설겆이 좀 해놔야겠다.
아침식사를 하고, 담배 한 대를 피고 있는 이 순간,
나는 아주 평화롭고, 느슨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오랫동안 찾아왔던 동사서독, Divx를 구한 것도 기쁘다.
얼마 전 한 여자로부터 너는 왜 청바지를 입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었는데
나는 이렇게 답변해 줬었다.
조금 어렸을 때는 통이 큰 청바지들을 입곤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통이 적당한 청바지를 입으려고 하니
어쩐지 청바지가 내게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야.
청바지는 왠지 밝고 건강한 이미지가 느껴지는데
그런 이미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렇지만 남성용 나팔 청바지라면 입어볼 용의는 있어.
정말 청바지 입은 내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
그러고 보면 반바지류를 제외한다면 밝은 색 하의를 입는 일은 전혀 없었던 것도 같다.
밝은 색 하의는 어쩐지 가벼워보인다는 생각을 그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후 한 스팸메일을 받았는데
그 메일 속에 소개된 쇼핑몰에서 나는 나팔 청바지를 기어이 구입하고 말았다.
아직까지 배송되고 있지는 않지만 급할 건 없다.
뭐 당장 가져다 준다 해도 당장 입을 것 같지는 않으니.
비록 지금은 여자들이 입는 나팔 청바지를 입고 싶어하고,
또 가끔은 남성용 화장품이나 남성용 치마도 있었으면 생각할 때도 있지만
나는 내가 여성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나는 오히려 내 체형보다는 훨씬 더 남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팔바지를 입든 말든, 게으르든 말든.
이상한 파마 머리들이 뭐라 하든 별 상관은 없다.
다만 날씨가 좀 춥다.
아. 또 다시 춥고 배고픈 겨울이 오나보다. 훌쩍. !_!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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