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민 떠나던 날 (2002-09-20)

작성자  
   achor ( Hit: 1056 Vote: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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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용민이 전화해 온 것은 약속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각이었다.
새벽 6시 30분에 낙성대에서 만나기로 했으면서도 6시, 용민은 벌써 강남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거나 조용히 떠나는 것을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특별히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오직 두 명만 누울 수 있는 침대에 이미 쓰러져 버린 vluez와 keqi 덕택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겠고.
용민의 전화를 받고 후다닥, 이빨을 닦는 둥 마는 둥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한 후 옷을 걸쳐 입고 출발한다.

이제는 신림4거리 조차도 나가기 귀찮아 하는 내게 있어서 인천국제공항은 너무도 먼 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간 많이 찾아뵙지 못해 항상 죄송스러웠던 할머니를
이번만큼은 꼭 찾아뵈야겠다고 결심했던 터였고.
부모님께서는 내일 출발하실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오늘 새벽 시골로 출발하신다 하셨다.
그러나 결국 나는 용민을 배웅 나갈 것을 선택하였다.

나는 내 의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다.
yahon이 군대가던 그 무렵에도 나는 혼자 살고 있었고, 또한 전혀 계획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 날도 어김없이 yahon의 입대를 아쉬워하며 거나하게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이 잠들었다.
결국 yahon은 혼자 해병대 입대를 하였다.
나와 갈 계획으로 가족들의 배웅마저도 뿌리쳤을 그였을 텐데
나는 그를 그 힘들다는 해병대로 혼자 보내고 만 것이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yahon에게 항상 갖고 있는 미안함이다.
나는 그가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할 때면 항상 이 나의 너무도 커다란 잘못을 생각하며 용서하곤 한다.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귀찮은 마음이 든다 하여도,
가족을 조금 서운하게 할 지라도
나는 나 스스로 의리 없는 놈이라는 자책감에 부끄러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 해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면
나 역시도 누군가와의 이별을 아쉬워 해주는 그런 조연으로서의 역할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첫 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어쨌든 거리에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텅빈 신대방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당산역으로 이동한 후
운 좋게도 바로 도착한 공항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추석을 맞이하여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는 모양이다.
첫 자켓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마치 90년대 초반 터프가이 흉내를 낸 듯한 사람이
연신 사투리를 써가며 캠코더를 돌려댄다.

나는 그 캠코더에 행여나 내 얼굴이 들어간다면 얼마나 기분 나쁠까 생각해 본다.
그의 필름 속에서 나는 그저 주변 배경으로 밖에 안 여겨지겠지만,
곧 그의 필름을 보는 그 누구라도 나를 의식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가 버스 내부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맨 뒤에 앉은 나에게도 결국 랜즈가 향해졌지만
나는 그 가족 중에도 예쁘고 젊은 여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하며 눈을 감는다.
슬슬 밀려오기 시작하는 잠을 조금 보충.



공항은 바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분주했다.
한 달 전쯤 찾았던 공항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용민은 친형과 미국인 친구와 함께 있었다.
미국인 친구가 그 이른 시각, 인천공항에 있었다는 건 상당히 의외였다.
그녀는 어쩌면 용민을 좋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조연이 되어 먼 곳까지 타인을 배웅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군대 가던 날 나를 배웅해 주었던 사람이 새삼 고마워졌다.


용민의 친형은 혹 용민이 나약한 마음을 먹을까봐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독한 마음을 강조하곤 했는데
그래서 나는 용민에게 별 말을 해주지는 못했다.
나야 진지해야 할수록 경박해 지는 편이라서
가서 대충 놀다가 돌아와라, 너무 영어 잘 하지 마라 등의
별로 유용할 것도 없는 농담들만 떠올랐던 터였다.


지난 15일, 우리 삼형제는 단촐하게 용민의 해외진출을 축하하며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용민은 담배 한 갑을 산 후 한 개피를 꺼내 피곤,
마지막 담배라며 내게 나머지 담배들과 라이터를 건냈다.
나는 돌아와 그것이 용민의 위대한 유물이라도 대듯이 잘 간직해 두었으나
연이어 만난 16,17일 내내 용민은 또 다른 담배를 피워댔다.

용민은 오늘도 다소 초조했던지
줄담배를 피웠다.
그리곤 그렇게 들어갔다.




별로 어려울 것도, 힘들 것도 없는 일이다.
당연히 잘 놀다 돌아와야 한다.
물론 너무 영어 잘 해서도 안 되겠고.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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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hon2002-09-22 00:08:12
허허 할말 없군.

 bothers2002-09-22 01:49:39
프로 레슬러로 데뷰만 하지 말아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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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