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최면 (2001-11-06)

작성자  
   achor ( Hit: 1185 Vote: 23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벌써 정오를 훨씬 넘겨버리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겠으나 학교에 가야하는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면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내 평소의 삶에는 하루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전에만 잠깐 빛이 들어오는 사무실 구조도 그렇거니와 외출을 싫어하는 내 삶의 형태 또한
나의 하루에 대한 구분의 경계를 허물어 준다.
나는 졸리지 않으면 수 십 시간을 안 잔 채로 버티고, 졸리면 수 십 시간을 자기도 한다.
고정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등교밖에 없기에 나는 화,수요일이 아니라면 적어도 시간에는 자유롭다.

이렇게 오랜동안 잠을 안 잔 날은 대개 등교하기 몇 시간 전에 잠들거나
학교에 가서도 수업시간에 졸 것이 염려되어 아예 등교를 포기해 버리곤 한다.
아마 오늘 또한 그렇게 될 것 같다.
나는 포기할 건 포기해 버리고 그 대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에 능숙하다.
시험을 보지 못했거나 등교하지 못해 얻은 학점의 대가를 나는 그간 담담히 받아들여 왔다. --;

요즘 나는 참 바쁘다.
여전히 바쁘다는 말은 내게 있어서 민망한 말이다.
나보다 수 백 배 바쁠 핑클도 건재한데
고작해야 빈둥거리는 내가 바빠봐야 얼마나 바쁘겠는가.
그런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나는, 참 바쁘다고 말할 자신이 있다.

요즘 나는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작업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언젠가는 일거리를 찾아서 수 십 통의 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또 심지어 직접 공장까지 찾아가기도 했던 날들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마음 한 편과 고마운 마음 한 편을 가지고 조심스레 의뢰들을 거절해 나가고 있다.
나 혼자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어서 돈 벌어 전세를 가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배 좀 고프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 만들어 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꾸준히 한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 당장은 나를 먹고 살 수 있게 해주겠지만
꾸준히 연구하고 시도하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에 밀려 종국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고맙게도 나를 기억해 주고, 찾아준 사람들을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한 번 거절하면 다시는 찾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다.
그런 일방성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전화와 같다.
전화는 아주 일방적인 수단이다.
나는 아주 긴급한 상황이라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긴급한 상황보다 더 긴박한 사건이 전화를 통해 일어날 수 있기에 힘겹게 각오하고 전화를 받았을 때
그저 안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내 긴급한 상황을 이해해 주는 대신에
바쁘다고 다음에 전화 걸겠다고 하는 내 말에 서운해 하는, 그런 것과 같다.

전화 앞에서는 내 상황이나 입장에 상관 없이 전화 건 사람의 입장만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것은 너무나도 일방적이다.
또한 사람들의 이해심이 타인을 충분히 이해해 줄만큼 넓지도 않고. 나 역시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전화를 잘 걸지 않을 지도 모른다. --;

벌써 13시가 넘었군. !_!
아. 오늘은 꼭 학교 가야 하는데...
지난 주에 중간고사 안 본 거, 찾아가서 사정 좀 말해야 할텐데... --+
이번 학기 또 학고 맞으면 정말 허무할텐데... 피 같은 내 학비. 어떻게 모은 건데. 훌쩍. !_!

그렇지만 비참한 고학생의 비애는 그렇게 눈물 젖게만 하는 신파극으로 끝맺지 않는다.
나는 그럼에도 행복하다.
지난 밤에는 특별한 입시전형 없이 서류와 면접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대학원을 찾아냈고,
지난 밤 내내 짠 프로그램도 잘 돌아가고 있다.
면도를 안 해 꾸준히 자라난 내 턱수염도 귀엽기만 하고,
과소비임을 알면서도 각오하고 사먹는 붕어싸만코 맛도 참 좋다.

누누히 말하지만 나는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자기 위안이라고 해도 좋고, 자기 최면이라고 해도 상관 없다. --;
나는 지금의 이 행복함, 만족스러움이 영원히 가길 갈망하고 있는 게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41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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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