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2011-09-04)

작성자  
   achor ( Vote: 13 )
분류      사회

이제 막 입주가 시작된 신축 아파트다.
중간중간 건축자재가 보이기도 하고, 미장되지 않은 부분도 듬성듬성 드러나 있다.

15층에 복도식 구성이고,
엘리베이터는 2대 설치돼 있다.

엘리베이터는
보통 이럴 경우 홀수층, 짝수층 한 대씩 나눠 설정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아직 그런 섬세한 설정까지는 손볼 여유가 없었는지
2대의 엘리베이터 모두 전층을 운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곳에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다.



시스템이 인간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더 인간다운 일임은 분명하다.
문제가 없다면 이성과 자율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이 굳이 시스템의 통제를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시스템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운행되고 있는 엘리베이터는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만이 가득하였다.
이성에 의한 판단력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내려갈 것이라면 2대의 엘리베이터 현재 위치를 판단하고, 더 가까운 쪽의 내려가는 버튼을 눌러 주면 된다.
올라갈 것이라면 마찬가지도 2대를 비교 후 더 가까운 쪽의 올라가는 버튼을 눌러 주면 되는 것이고.

그러나 이 간단한 것조차 인간들은 문제 없이 수행하지 못했다.
의례 2대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모두 누르고 있었고,
심지어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방향과 상관 없이 모든 버튼을 누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전자는 이기심이다.
나 하나 조금 빨리 가겠다고 혹시 모를 정체까지도 감안하여 2대를 모두 누르고 있다.
후자는 무지다.
위, 아래 모두 누르면 결국은 최소한 문이 한 번 더 열리고 닫혀야 해서 나까지도 늦게 가게 되는 걸 생각치 못한다.



이기심에 기인하였든, 무지에 기인하였든,
아니면 그까짓 것 어떠하든 어때, 하는 무뇌아적 성향에 기인하였든

인간이 시스템에 의해 통제 받아야 모두가 편한 상황이 안타까웠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제대로 활용치 못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무지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 어딘가에서 본 것도 같다.
우리 주변에도 자유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통제된 배부름을 그리워 하거나 심적 위안을 추구하는 이들은 흔하다.



그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도
이내 짝홀층 분할 운행으로 바뀔 것이다,
여느 곳에서처럼, 서로를 위하여 인간들이 시스템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살 맛 나는 세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구성원인 인간들이
조금 더 이기심을 버려야 하고,
궁극적으로 무엇이 더 좋은 것이며 그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현생인류로는 이것이
불가능 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것은 교육이나 계도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현생인류의 근본적 한계처럼 느껴졌다.

- achor


본문 내용은 4,968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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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14:06:17
요즘 소셜 SNS 덧글... 대세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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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3/04/2025 12: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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