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2009-11-11)

작성자  
   achor ( Hit: 1820 Vote: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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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새로운 한 주의 시작으로 정신 없던 9일 월요일, 퇴근을 얼마 앞둔 시간이었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짧고 무게가 있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사건의 크기에 비해 대화는 너무도 짧았다.
원인도, 사정도,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나보다 충격이 크실 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지 않았다.
그간 때가 되면 알게 되는 것, 굳이 상대가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가급적 피하려는 부자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던 탓도 있었겠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소식이었다.
지난 추석 때만 해도 아직 정정하셨는데...



2.
어느덧 11년이나 시간이 흘러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해 4월,
스물 둘이라는 내 나이는 이미 성인이었으나, 그럼에도 너무 어렸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언제나처럼 나는 62-3에서 시간을 향유하고 있었다.
젊음은 달콤했고, 시간은 아쉬었다.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그 스물 두 살의 자정에
장손으로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나로서는
슬퍼하며 당장이라도 달려가야 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그러나 그 젊음의 향응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 뉘엿뉘엿 집으로 향했었다.

그것은 결국 내게
잊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남겨졌다.

나는 그 시절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쾌락의 아쉬운 감정을 가졌던 내 젊은 날을
스스로 용서치 못한 채 살아왔다.

그래서 할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가슴 아팠는 지 모르겠다.



3.
새삼 살고 죽는 사람, 그리고 대자연의 사이클을 생각한다.

고민하느라 이야기 하지 못했었다.
아내가 임신을 했다.

내 결혼, 그리고 증손자를 그토록 원하시던 할머니께서
내 사회적인 고민 탓에 임신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떠나신 게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다.
그 소식을 조금만 더 빨리 전했더라면,
어쩌면 할머니께서 힘을 내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염 없이 아쉬워 진다.

할머니는 떠나가셨지만
또 다시 새 생명이 싹텄다.
염치 없지만 할머니의 축복이 아기에게 내려지길 소망해 본다.



4.
가족 중 개신교도는 없었지만
할머니께서 생전, 늦게나마 개신교에 귀의하셨기에 장례는 개신교식으로 치뤄졌다.

목사님은 이야기 하셨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물론 그렇기에 종교적인 삶이 필요하다는 논조였겠으나
나는 삶은 죽음의 대극이 아니라고 역설하던 하루키를 떠올렸다.

삶은 죽음의 대극이 아니다.
죽음이 삶, 지천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중한 사람들의 가치를 다시금 돌이켜 보게 했다.
결국은 어느 한 순간 떠나갈 수 있는 삶 속에서
너무 각박하게, 너무 치졸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 지 반성했다.



5.
급변한 삶의 분위기 속에서 어느덧 잊어버렸던
스물 두 살의 할아버지 죽음도, 또한 정자에서 읽던 하루키도...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샤롯데를 처음 만났던 시골집의 그 옥상은 이제 다시 찾을 수 없으리라.
위인들의 연혁을 보며 나는 무얼 하고 있나 고민했던 내 유년기의 추억도 이제 사라져 가리라.
태어나면서부터 명절이면 항상 보내왔던 내 정든 시골집 또한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함께 사라지리라.

사후세계가 있는 지 없는 지는 모른다.
다만 내 할머니, 너무도 멋졌던 내 할머니의 평온한 영면을 진심으로 빈다.

- achor


본문 내용은 5,454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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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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