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제45회 정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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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12 Vote: 9 )

그는 역시 무대체질이었다. 나는 일전에 그가 무대 위에서
열변을 토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비록 그것이 학내공연
이었긴 했지만 그의 카리스마를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음
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홀로 있거나 내 옆에 존재할
땐 특별하지 않았지만 대중, 곧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이 들
끓는 공간에서는 영웅이었고, 항상 빛을 내곤 하였다.

나는 호메로스를 생각했고, 율리시스를 생각했다. 그의 생
사를 걸었던 모험이 그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었
을까.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더 이상 세상에 존
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TV 속에는 온통 섹시함의 물
결이다. 나는 그런 한국의 모습이 참 마음에 든다. 섹시함이
야말로 인간에게 남아있는 최대의 미덕이기에.

베이비복스가 고상한 섹시함을 선보이고 있을 때 성훈으로
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리곤 신도림에서 만나 신촌 맥도널드
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이제 곧 구멍이 날지도 모르는 런닝
셔츠, 이른바 난닝구로 통하는 그 누런 옷가지를 애지중지하
시며 내게 건내주셨다. "부디 우리 가문을 빛내다오."

란희와 문숙, 그리고 인옥이가 있었다. 우리는 하루종일
한 끼도 먹지 못해 배고파했지만 남아있는 건 오직 감자튀김
몇 조각뿐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법진의 자리를 옮기자는 요
구에 우리는 롤링스톤즈라는 웨스턴바로 향했다.

웨스턴바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분위기 중에 하나다. 대개
그런 곳은 아무도 존재할 거라 생각치 않는, 터무니없이 맛
없는 안주가 존재하는가 하면 또 게다가 시끄러운 음악소리,
미국서부의 모습을 잔뜩 품고 있는 모습들 모두 역겨운 형상
이었다. 미국서부에 환상을 품은 젊은이가 아직 살아가고 있
다는 상상은 일본에서나 가능할 것 같다.

희진과 헌, 미선, 그리고 선웅이 차례로 왔다. 우리는 엠
티를 이야기한다. 지난여름을 보낸 1년 동안 나는 바다의 외
침에 시달려 왔다. 파란하늘과 시원한 파도소리, 그리고 시
대를 풍미했던 유행가 가락이 내 뇌리를 연신 흩어 내리곤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시간 맞추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현
실에 우울해진다. 어쩔 수 없는 사회인이 되어 가는 모습에
심한 갈증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쿵따리샤바라나 여름이야
기 같은 대중가요를 기억하고 있는데...

3차는 별로 꾸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술집의 2층이
다. 우리는 둘러앉아 게임을 했는데 적막이 닥친다. 생의 가
장 중요한 결정은 오랫동안 생각해봤다고 느끼지만 결국은
순간적인 일이라고 한다. 그렇게 적막은 순간에 닥쳐온다.
나는 기억을 잃고, 깨어났을 땐 성훈과 걷고 있다.

"여기가 어디지?"
"영등포."
"어떻게 된 거야?"
"글세. 나도 모르겠어. 나도 깨어나 보니 의정부였고, 다
시 깨어나 보니 영등포야."

우리는 일전에 신촌에서 술을 마시다 깨어나보니 우의동이
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날은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었다. 이
번엔 성훈이 핸드폰을 잃어버렸단다.

우리는 과거 수천, 수백 년 전부터 북진을 꿈꿔왔던 한민
족의 후예가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는 항상 술에 취하면 북
진을 하나 보다. 우리는 왜 의정부에 있었을까.

영등포에서 나는 생각한다. 어느 TV 드라마였던가, 아님
소설의 한 장면이었던가. 정확히 생각나진 않지만 눈앞에 그
려지는 영상을 따라해 본다. 그리곤 깨닫는다. 역시 허상이
로군. 인간은 그리하여 존재하는 가치를 지닌다. 인간이 소
설의 한 주인공이 아니고, 삶이 스토리가 아님을 경험한다.

우리는 율리시스처럼 여정을 겪는다. 이번엔 신림이다. 시
각은 27시 경.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다. 철저히 운에 의해
결정날 것 같은 가위바위보도 사실 알고 보면 실력이다. 허
접한 사람들끼리 가위바위보 하는 거야 운을 바라는 단순한
재미일 수도 있지만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에 운을 기
대하는 건 요행이다. 실력으로 결정짓는다. 성훈은 연신 여
자들에게 껄떡댄다.

28시. 지쳤다. 어떻게 흘러온 시간인지 느껴지지 않는다.
해물파전 하나 먹을까 하고 들어간 술집에서 해물전골을 시
켜놓곤 성훈은 다시 잠들었다. 내 앞에는 시간이 존재했고,
내 뒤에는 여자가 존재했다. 나는 조개도 먹고, 홍합도 먹
고, 게도 먹는다. 시간은 흘러간다.

아침이 밝아 벤치에 앉아 차를 기다리며 거리를 바라본다.
지난 밤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우리가 쓸어놓은 거리에 애
정이 피어오른다.

2000년 7월 23일 아침 5시 30분.
날씨는 다시 무더워지고, 우리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간혹 흐르는 바람에 시원해 한다.
시간이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성훈 : 힘없이 살아져간 핸드폰에 심심한 애도를.
란희 : 몇 해 동안 꿋꿋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 줘서
항상 감사한 마음 갖고 있다.
문숙 : 연신 죽는 모습만 보여주는구나.
인옥 : 드디어 만났던 게로군.
법진 : 선택은 순간이라 하건만.
희진 : 이번엔 네가 고생했다고 하던데?
헌 : 보기 좋더군.
미선 : 오랜만이야.
선웅 : 지난 생일 축하한다.
응수 : 기억은 안 난다만 왔었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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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