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얼굴이 달아 오른 모양새가 술을 꽤나 드신 모양이다. 술 한 잔에도
얼굴이 발갛게 되어버리는 우리 아버지는 춤을 추듯 비틀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평소 기분좋은 일로 술을 드시는 분이 아니어서 먼저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어디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국이라도 좀 드세요.” 어머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됐어!”
무슨 일이었을까. 조금 있다가 안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흐느낌. 그것은 항상 강하게만 느꼈던 당신과는 사뭇 달라 당황스러웠다.
이윽고는 방바닥이 꺼지도록 손으로 힘껏 내리치면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셨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식구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아버지의 울음섞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 나 못 배웠다.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우고 학교도 남들만큼 못 다녔어. 못
배웠다구!”
“왜 그래, 누가 당신 무시하는 말 했어? 도대체 왜 그래?” 어머니의 안타까움과
아버지의 울분은 저녁상의 국이 다 식도록, 텔레비전의 정규방송이 다 끝나가도록
가라앉질 못했다.
“너희는 공부 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뒷바라지하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 정숙이. 그렇게 해줄거야.”
끝끝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버지는 그냥 잠이 드셔버렸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이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도 쓴웃음만이 입가에 맴돌았다.
스스로 많은 부분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학벌'이란 말을 아버지를 통해 뚜렷이
다시 보는 것이 화가 났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한테 항상 “학교는 무슨 학교냐”며 “어서 새끼나 꼬라”고
호통을 치셨다고 했다. 이젠 아버지의 가난한 세월은 지나갔다. 그래서 달라진
세상은 고등학교 정도는 당연한 듯 굴면서 아버지 당신께 죄를 주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아버지와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진 않다.
물론 한쪽에선 하버드대 졸업장을 내던지고 성공한 빌 게이츠나 코미디언 심형래의
영화감독행에 찬사를 바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유행이긴 하다.
하지만 귀를 잘 열고 있어야 한다. “학벌은 중요하지 않아.” 이 얄팍한 유행어
뒤에 “그런데 학교는 어디래? 이왕이면 명문대 나오면 좋지 뭐”란 말이 어김없이
뒤따르는 게 보통이니까.
전문대졸, 4년제졸, 3류대, 명문대. 현재의 `나'와 상관없이 원초적으로 나를
규정해버릴 분류 코드들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또 화나게 한다.
대학과 사회가 겹쳐가는 언저리 3학년이다. 친구들 사이에는 3류대 컴플렉스라는
전염성의 우울증이 곧잘 번져있다.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하지만 학벌주의란 이름 아래 어느새 불안이 나를 꽁꽁 옥죄고, 모든
것이 허황한 연극이 돼버린다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다. 정말이지 싫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