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에 가면 우리나라 가정과 약간 다른 형태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자의 입김이 세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의 결정도 여자가 하고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
는 것도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다. 이른바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오래 전의 얘기가 됐지만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살
아 있을 때 그보다는 오히려 부인 이멜다가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다.
미스 필리핀 출신으로 잘 생긴 외모와 활달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
지만 하여간 그녀는 쉬지 않고 여론의 표적이 됐다. 이 때문에 마르
코스가 몰락했을 때 우리나라에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더
니..."하며 혀를 찬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에서 들은 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는 큰 차
이가 있었다. 독재와 부정부패가 문제였지 여자가 그 정도 설치는 것
은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철저한 부계사회였다. 가정에서 남자, 특
히 아버지의 위상은 신성불가침의 것이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중년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아버지상은
대개 비슷하다. 우선 말이 없고 집안에 들어오시면 찬 바람이 돌만큼
근엄하다. 어쩌다 한번 야단을 치면 어머니 이하 전가족이 오금을 못
핀다. 아버지는 한 마디로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이같은 아버지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유교적 가부
장제도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겠지만 이와 함께 경제권 때문이 아
니었나 싶다. 집안에서 생산자로서 돈을 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고
나머지는 소비자로서 그 돈으로 가사를 꾸려 나가거나 학교를 다녔
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권위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돈 버는 일 이
외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대도시에서 젊은 부부들이 번갈아 가며 식사당번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이들의 얘기는 "돈도 같이 벌고 생활비
도 나눠 내는데 가사 일도 분담해서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
다.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가부장적 전통에 젖은 사람으로서는 체질적
으로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가정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같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통계청의 발표를 보니 부부간의 역할 분담이 차츰씩 달라
지고 있다. 돈을 안 벌고 그 대신 집안 일을 하는 남자는 늘어나는
반면 가사보다는 직장 일에 매달리는 여자는 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올 1/4분기 중 직장을 포기하고 집에서 놀
거나 집안 일을 돌보는 남자(15세 이상)가 전국적으로 69만9천명에
달했다. 이에 따라 남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84년 이후 처음으로 전
년 동기보다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에 여성은 사무.전문직
을 중심으로 20대의 취업 증가가 눈에 크게 띄었다.
이같은 현상은 결국 가정에서의 경제권 분점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결국 가정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남아 남방국가처럼은 아니더라도 예전의 위엄 있는 아버
지상을 찾기는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다.